2011.08.24 10:12

오사카 드로잉 여행

그림을 시작한 이유중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만한 '여행지에서 그림그리는 로망' 때문도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유럽여행을 그림여행으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드로잉을 함께했던 분들과 일본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네요. 여행예정지는 오사카, 고베, 교토로 예전에 다녀온 곳이기도 해서 관광으로 다녀왔던 곳을 그림그리러 간다는 것도 기대되었어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대했던 풍경의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보다 더 많은걸 경험하고 배우고 얻어왔습니다. 특히 여행을 드로잉으로 기록했다는 자체가 제 스스로에게 대견한 일이죠.

여행전날 짐싸면서 그렸는데 완성은 못한채^^


김포공항 출발이었단 사실을 인천공항에 가서 알았어요. 타야하는 비행기가 없더라구요. ㅎㅎ 인천공항에 환전신청을 해놨기에 환전만 해서 부랴부랴 김포공항으로 향했어요. 그래도 게이트 앞에서 출발하기 전까지 겨우 비행기 한장 그릴 여유를 얻었네요.


이번 드로잉여행은 오사카의 예술가 공동체 >'아망토'<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며 각 예술가들이 자신의 천직을 찾고, 생계를 위한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곳입니다. 이곳은 따로 포스팅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다른 드로잉팀원들보다 하루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는데, 그날이 2주에 한번 아망토 카페에서 열리는 누드크로키 워크숍이 있는 날이라 참가 기회를 얻었어요. 동네 문방구에서 공책을 사다가 들어갔죠. 카페의 좁은 2층 방에 10여명의 참가자들이 둘러앉아있고, 남자 모델이 있으시더라구요. 자리도 없어서 맨 앞에 앉아서.. 살짝 당황했다지요. 홍홍. =.=;;

워크숍에는 머리가 허연 남자분부터 아주머니까지 계셨는데, 끝나고 돌아가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안되는 일본어로 크로키에 초보라고 했더니 나름대로 그림이 귀엽다며 칭찬해주시더라구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좋아해주고 영향을 주고 받을수 있다는 게 기뻤습니다.


아침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동네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막힌듯 이어지는 골목들을 찾아다니다보니 중고/수제 악세사리와 공정무역 소품 파는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더라구요. 가게에 동네 지도가 놓여있길래 아저씨에게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잠시 기다리래놓고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를 해주시네요. 나카자키 지역의 카페와 여러 샵들이 소개된 작은 책자를 얻은 후, 내친김에 점심먹을 곳을 물었더니 바로 옆집이 일본가정식 백반이라고 합니다.

세미마루라는 백반집에서 먹은 밥입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습니다. 밥이 나오면 먹기전에 그릴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것과는 달라요.


드디어 드로잉팀과 합류하여 나카자키라는 오래된 이 동네의 골목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카자키초
  에도시대까지 가장 넓었다는 골목길(왼쪽)에 늘어서있는 일본의 전통가옥. 7채씩 모여 있어서 '나나껜 나가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알고나서 보니까 온통 집들이 7채씩 붙어있더라구요. 그 중에는 중간에 신축을 하거나 주차장이 되어버린 집도 있었지만 나카자키 지역 전체에 걸쳐 많은 7채집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운데 그린 집은 리모델링이 되지도 않아서 그냥 창고처럼 보이는 집들인데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그 뒤에 새로 지은 높은건물의 맨션과, 오른쪽에 이쁘장한 옷집, 그리고 동네 골목에 앉아서 그리다보니 스케이트보드, 농구공 등등 가지고 노는 꼬마들이 있었지요. 나중에 꼬마들이 그림 구경하러 와서는 이중에 이 공 들고 있는 애가 얘냐 쟤냐 서로 손짓발짓하며 신나게 수다떨던 기억이 납니다.
  이날 오전에 혼자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닐때 이 지역 골목을 수채화에 담던 할머니 4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우리가 여기서 그림그리고 있는동안은 DSLR을 멘 할아버지분들이 출사 나오셨더라구요. 역시 고령화사회가 되어서 여러가지 예술활동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가봐요. 저도 나중에 머리 허옇게 되어서 풍경그리고 출사다니면 좋겠어요. 함께해요 :)


이날 드로잉에 고경일 선생님의 스승님인 츠바키자키 선생님이 함께하셨는데, 작품하시던 한지를 나눠주셨습니다. 다른 분이 한지에 그림그리면서 종이가 번져서 어렵다고 하시길래 그게 무슨 느낌인지 궁금하여 늦게 하나 더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지의 느낌을 담고 싶어서 아스팔트 길바닥에 놓고 그렸으나.. 음.. 담겼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나중에 저녁에 모두모여서 그린 그림들 구경할때, 츠바키자키 선생님이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치시는 걸 보고 충격먹어서 저도 한번 꾸겨봤습니다. '열심히 그린 그림 꾸겨보기'의 쾌감이 있었어요.


고베 츠바키자키 선생님 작업실

그 다음날 고베에 있는 츠바키자키 선생님 작업실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수 주먹밥과 소면을 준비해주셨고, 작업실과 방대한 양의 습작들, 작품들을 보여주셨어요.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나이 40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예술가가 되셨기 때문에 누구의 계통이 없는 이유로 혹은 그 덕분에 더 자유롭지만 더 열심히 작품활동을 하십니다. 놀랍도록 즐겁고 자유로운 작품과 놀랍도록 많은 작업량에 큰 통찰을 얻었습니다.

초대해주신 집에서 직접 해주신 오니기리와 소면을 먹고 작업실과 작품, 습작을 구경하고 둘러앉아 수박 먹는 중.


고경일 선생님의 또다른 스승, 나카니시 선생님을 만나러 교토 가던길에 만난 신기하게 생긴 나무. 길거리에 멈춰서, 식당에 앉아서 어디에서든 그림그리며 혼자놀 수 있는 어슬렁이라지요. ㅎㅎ


다음날은 다시 오사카지역 드로잉을 했습니다. 

 오사카 중앙공회당
  일본 메이지 시대 건축계의 대부였던 다쓰노 긴코는 암스테르담 역과 헬싱키 역의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을 본따 설계한 도쿄역(1914)과 오사카 중앙공회당(1918) 건물을 지었고, 그의 제자 스카모토 야스시가 이를 이어받아 서울역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쿄 처음 방문시, 도쿄역사를 보면서 그동안 내것인줄 알았던 것이 식민역사에 의해 만들어진것을 알았을때, 마징가제트와 은하철도999가 일본만화라는 걸 알게 되었을때 만큼의 충격이 있었죠. 건물을 너무 세세히 그리다보면 너무 질려버리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그림을 완성해보고 싶었습니다. 햇빛을 피해 나무 아래에서 그렸지만 중간에 비가 와서 스케치북이 비에 젖는게 재미있어서 그대로 물감을 발라봤어요.(비오는날 수채화!)


아망토 게스트하우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공동체는 나카자키 지역의 오래된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데요. 내내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예요.


아망토 카페: 10년 된 아망토 공동체가 시작된 곳입니다.


아망토 채식카페: 아주 작은 카페 민토예요. 리나상에게 선물하고 온 그림이네요. 


아망토의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밴죠와 인도악기 공연입니다. 아주 신기한 소리가 나요.


이 외에도 나카자키 지역의 골목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어요. 우산, 고양이, 먹은것 등등


공식 드로잉 일정의 마지막날, 국어학자인 재일동포 2세 한남수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여행 4번째이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삶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본적이 없었어요. 우리나라가 '조선'이던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국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누구 한쪽이 더 이쁘다고 얘기할수 없는데 자꾸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평생 세금을 내고 있는데도 일본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상황.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라는 그 이후 세대들과 조선학교 등등을 알게 된 값진 시간이었습니다.(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추천합니다)


드로잉 일정이 끝난 후 며칠 더 머물면서 아망토 공동체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는데요. 거기 참여하셨던 분들입니다. 이 분들과 함께 이번 금요일(8/26)에 >아망토 공동체 방문에서 얻은 통찰에 대한 공유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관광을 목적으로 일본에 갔을때에는 영어만으로도 불편함이 없었는데요. 공동체를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다보니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게 참 미안하고 아쉽더라구요. 하지만 그림이라는 언어로 나를 알리고 서로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참 매력적입니다. 지난번 전시했던 엽서라던가, 돌아다니면서 그린 그림, 그리고 즉석에서 그린 그림들을 일본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전까지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과 참 다른 즐거움이 있더군요.


물론 꼭 여행 뿐 아니라 일상에서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방법으로도 그림을 권합니다. 그리고 서로 자극받으면서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행운이네요.
* 어슬렁의 그림일기 http://netstrolling.tumblr.com/
* 언제나처럼 이 글의 모든 글과 그림은 수정/배포/영리사용 가능합니다. (CC-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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